한국은 여류영화감독의 선진국
영화감독은 여성에게 힘겨운 일
현재 한국에는 여류라고 관사가 붙은 영화감독은 하나도 없다. 다른 예술분야에 있어서는 하고 많은 여류들이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는데, 유독 영화계에서만은 여성이 발을 붙이기 어려운 까닭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천부적 재능, 정열, 노력. 대개의 예술이 이 세가지를 구비하고, 자신의 극기(克己), 조정할 수 있으면 어느 정도 성공의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헌데 영화만은 시간과 공간을 혼자서 메꿀 수 없다는데 가장 큰 애로가 있다. 제작, 감독, 각본, 주연, 음악을 혼자서 감당한 찰리 채플린 같은 대천재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채플린의 경우, 한가지만으로도 어려운 일을 다섯가지나 혼자의 힘으로 해냈다는 것이(그것도 대단히 우수한 수준으로) 그의 뛰어난 재능을 뒷받침하는 일이지만 아무리 채플린이라 할지라도 시간적으로 반듯이 동시성을 요하는 일에서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고 - 예를 들어 촬영, 조명, 진행 녹음등의 - 단 한자의 필름도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던 일이다. 한 사람의 영화감독이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채플린 같은 천재가 아닐지라도 일곱가지 일까지는 겸할 수가 있을는지 모른다. 기획, 제작, 각본, 감독 연기, 음악, 편집 - 이것들은 김 시간과 재능, 정력, 재력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앞서 말한 동시성에서 약간씩 시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요즘같이 팽팽 돌아가는 시대에 아마츄어의 집념이나 장난이면 몰라도 기업화된 영화산업에서 이렇게 유구한 시간을 걸고 영화를 만들어낼 사람이 있을 것인가. 더구나 영화처럼 시대 감각을 타는 예술에 있어서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 할지라도 영화예술 만은 막대한 자본과 여러사람의 힘과 기능과 재능이 합쳐지지 않고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품 완성시의 대표자는 감독이니 만치, 감독은 모든 분야에 신경을 써야 하고 그들을 통솔 지휘하는 동시, 책임을 져야하는 고달픈 작업을 시작부터 끝까지 감수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재능과 정열, 노력, 이 세가지 말고도 강한 리더 쉽, 인화(人和)의 묘를 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성격까지 겸비하고 있다면 두 말할 나위없이 최상의 조건이 될 수 있겠지.
그러니 이런 까다로운 조건으로 인해 여성이 영화감독으로 발붙이기는 어렵다고 볼 수 밖에 더구나 여성 경시의 풍습이 짙은 한국에 있어서야. 헌데 우습게도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실이 아니라 레이디 퍼스트의 구미나 일본 같은 영화 선진국에서도 비율로 보아 여류의 진출이 몇 안되는 것을 보면 역시 너무도 힘에 겨운 일인 때문일까.
최초의 여류감독 박남옥
20여년 전, 아직 한국은 중진국 대열에 조차 못미치는 나라였고 영화산업은 두말할 것 없는 영세성을 면치못하고 있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각본으로 입도선매, 지방 흥행사의 구미 여하에 따라 많건 적건 간의 돈이 걷히고, 자금이 떨어지면 한 달도 좋고 석달도 좋고, 스탭들은 기다리는 미덕과 인내의 화신들이었다. 묘한 아이러니는 그래도 그 시대에 한국 영화는 양산이 되었고 웬만한 영화라면 흥행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안방 안에 TV라는 극장이 등장하고 수많은 오락시설물이 경제 발전과 함께 밀어닥치면서 지금 영화는, 헤어날 수 없는 사양길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참으로 금석지감을 금할 길이 없다.
6 25 동란, 그리고 휴전협정을 거쳐 수복한지 몇 해 안되는 1956년. 서울 거리는 아직도 불탄 자리에 판자집들이 즐비한 상혼을 드러낸채 빈곤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 여름. 나의 가장 가까운 영우(映友) 박남옥이 한국 최초의 여류라고 관사가 붙은 영화감독으로 가치도 드높이 첫 발을 내딛었다.
그 당시 부군이었던 이보라씨의 각본 <미망인>으로 제작을 겸한 당당한 출발이었다. 박남옥의 영화에 건 꿈과 집념, 그리고 물불을 헤아릴줄 모르는 정열로 보아, 오히려 그녀로서는 늦은 감이 있었을는지 모르나, 그 무렵 세계를 통 털어놓고 보더라도 극영화 감독으로서의 여류는 거의 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얼마나 선구자 역을 했는지 헤아리고도 남을 만한 일이 아닌가. 시작할때의 포부와는 달리, 한 발 내딛은 그 길이 그녀에게는 두고두고 긴 세월을 아프게한 상혼투성이의 가시밭 길이었다. 젖먹이 딸을 등에 없고 레디 고우는 물론, 지방 흥행사 접촉에서부터 소도구 스탭들의 식사 시중까지도 때로는 들어야 하는 1인 4. 5역의 정신적 육체적 고달픔을 감당해야만 했다. 시난 고난 촬영이 끝나고 편집이 끝났지만 자금사정은 더욱 악화되고, 엄동설한의 해를 넘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남옥의 끈질긴 집념과 책임감은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완성을 보았고, 극장에 붙여졌다.
웬만한 강인성을 지닌 남자들이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극한 상황을 극복한 그녀의 철저한 집념-나 같은 인간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나는 외경(畏敬)의 염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16미리의 <미망인>한편으로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영화가를 떠나고야 말았다. 다만 영화에의 꿈을 아직도 휴화산처럼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집념이 언제 다시 불을 뿜게 될런지는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다.
홍일점 여판사의 이야기를 다룬 홍일점 여감독
1962년, 나약하고 정열이 부족한 나로서는 감히 꿈조차 꾸어볼 수 없었던 일이 현실의 이야기로 영글기 시작한다.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여판사의 주검을 놓고 쓰여진 추식씨의 각본으로 홍일점 여판사에 홍일점 여감독이라는 선전 효과로 하나의 화제를 불러 이르켜 보자는 제작자의 심산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고인에게나 양가의 유족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는 소재이다. 나는 한달을 여관에 들어앉아 각본 손질을 했다.
각본은 <유정무정>이라는 첫 작품이 나가고 그 뒤로도 몇 개의 작품이 발표되었지만 내가 감독으로 지목받은 이유는 다른데 있다. 영화평론가이자 시나리오 라이터인 유두연씨가 메가폰을 잡게 된 최초의 작품 <조춘>에서(1956년) 나는 파격적으로 치프 조감독을 맡게 되었다. 현장 경험이 없었던 유감독은 콘티뉴이티 기다 모든 연출자로서 할 일을 내게 일임했던 터라, 나는 이름을 걸지 않은 감독 수업을 <조춘><사랑의 십자가>(유두연 감독)<여인천하><애정삼백년>(이 두 작품은 윤봉춘감독)으로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 3년간의 활약을 인정 받았다고나 할까.
해방 다음해 뒷스탭을 지망해 영화계에 투신한지 16년만의 일이다. 결혼 생활 6년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10년이 넘어 연출부의 일을 했다면 감독에의 꿈을 키우고 잇었다고 해도 그리 당돌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지. 그러나 나는, 여자 박남옥의 선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경우 제작을 스스로 겸했다는 강점이-약점도 되었지만- 있었고, 역시 나의 케이스에서는 하나의 모험을 제작자가 감행했다고 해야할지. 자금 사정의 빈약으로 몇 고비의 중단, 돈들어가는 장면은 삭제, OL 정도로 넘어가면서 겨우겨우 완성. 물론 산고(産苦)에 비해 초라한 작품이 되었을 수밖에.
이어서 햇수로 그년이 걸린 <홀어머니>(64년)<오해가 남긴 것>(65년)등 비슷비슷한 조건 아래. 그래도 내가 감독한 세작품은 유산(流産)만은 면하고 세상에 태어난 셈이다. 비록 그 어는 한 작품도 나 자신에게 흡족함을 안겨주지는 못했고, 또 그 세작품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지만 .
1965년 나의 마지막 작품<오해가 남긴것>발표되기 몇 달 앞서, 오랜 연기생활로 기반을 닦았던 최은희가 <민며느리>로 데뷔했다. 그녀는 연기자 출신답게 주연을 겸하고 나왓다. <신필름>이라는 대 메이커에다 손 발이 척척 맞는 스탭들을 거느리고 진행을 했으니, 그녀는 나나 박남옥이 안았던 고통 같은 것은 느낄 필요도 없이 여유 만만하게 작품은 탄생시켰으리라. 그리고 67년에 그녀는 다시 <공주님의 첫 사랑>을 그런 조건 하에서 내놓았다. 그 후에도 내놓은 작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으나, 좌우간 여류 감독 세 번째를 이은 최은희는 우리 두 사람과는 달리, 마음껏 자신의 날개를 펼수 있었을 것이다.
최은희-지금 그녀는 어느 곳에? 영화가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준 그런 일만 없었더라도 우리 세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앞으로도 얼마든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그녀의 기반마져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이야 박남옥, 홍은원 그리고 최은희. 영화계 투신도 연령도 비슷비슷했던 헤 사람 가운데 박남옥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 자주 귀국해서 아주 떠난 기분은 아니지만- 최은희는 그렇게 증발이 되었고 오직 나만 서울의 하늘 아래 회색 빛으로 저물어 가는 인생을 살고 잇단 말인가.
나이가 60을 바라본다 해서 인생이 회색 빛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도 사랑하고, 청춘을 불사르며 몸 담아왔던 영화 현장에 이제는 발 붙일 자리가 없어졌다는 것이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단 한 작품이라도 마음에 흡족한 영화를 남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양길로 곤두박질 치고있는 영화라 할지라도 영화의 매력은 역시 새롭고 충만하다. 태어난 고향이 어디이건 간에 우리들의 고향은 영화가- 그 곳에도 이제는 낯선 사람들이 낯 익은 사람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70년대에 4번 타자로 등장한 황혜미
1970년대 벽두에, 그 낯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황혜미라는 여류감독이 4번 타자로 등장했다. 타이틀도 그렇사하게 <첫경험>--영화 현장과 멀어졌던 나는, 그녀가 한국 영화 현장에서 워밍업을 한 여성인지 아니면 외국에서 이론상으로 영화학을 익힌 여성인지 자세한 것은 모른다. 어쨌건 혜성처럼 나타나 장안의 화제를 모으며 그녀는 등장한 것이다. 기획, 각본, 감독 세 부분에 걸쳐 정열을 쏟은 그녀의 작품은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흥행면에서도 양호한 성적을 올린 것으로 안다. 제 7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는 것도 무척 반가운 일이다. 나중 난 뿔이 우뚝하게 체면을 세워줬다고나 할까. 그 여세를 몰고 그녀는 또 다시 <관계>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영화계의 단 하나의 여류 감독으로 길이 존속하기를 바란 나의 마음과는 달리, 그 이후 그녀 마저도 감감 소식! 여성의 행복은 가정이라는 평범한 진리 속에 파묻혀 자취를 감추었는지, 해 봐야 별 것이 아니드라는 2, 3년 간의 외도 였는지, 그 것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 세 사람의 나이보다는 20년 가깝게 젊을 것이라는 추측 아래 앞으로도 얼마든지 마음만 있으면 활약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기대를 걸어본다.
1980년대의 오늘날까지도 아직 동시 녹음의 기본 형태를 대부분의 영화사가 갖추지 못했다는 후진성-그로인해 세계의 이름 있는 영화 훼스티발에 명함 조차 내밀 수 없다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고 꿈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좌절감일 수 밖에 없다. 중진국을 넘어서는 경제 성장을 이룩한 우리 대한민국인데 어찌하여 문화정책에는 그렇게 인색해야 했단 말인가. 옛날 해방 다음해 내가 영화계에 들어가서의 첫 작품 <죄 없는 죄인>(최인규 감독)은 그래도 동시녹음을 시도했고 완성을 보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 작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 이르는 긴 세월을 후시 녹음으로 버티어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장 개척도 없이 우물 안 개구리는 자꾸 키워서 무엇에 쓰자는 이야기 인가. 최소한 세계 시장에 출품이라도 할수 잇는 기본 형태는 갖추어져야 사양길에서 다시 쳐다볼 언덕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이런 영화 후진국에서 네 사람의 여류 감독을 배출했다면 - 비록 우물 안 개구리적 존재였다고 할망정 - 이 면에 있어서는 결코 후진은 아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갖출 것을 다 갖춘 보다 좋은 환경에서 네 여성이 못다한 꿈을 이룩할 여류의 출현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안다. 해마다 배출되는 영화 학도 가 있고 남성 감독들 밑에서 조감독으로 묵묵히 길을 닦고 있을 여성들도 한 둘은 있는 모양이다. 앞 날을 기대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류 감독이여 나오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문제작을 들고 나오라. 4번 타자가 히트를 치고 나갔으니 5번 6번에서 홈런이 터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단, 그 홈런은 반드시 넓은 세계를 향해 날려라! 한국 영화의 발전과 아울러 제 5의 여류 감독의 출현을 고대하며 마운드를 떠난 2번 타자는 지켜 보리라.
영화를 지망하는 여류들이여! 한국은 여감독 배출에 있어서는 당당한 선진국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긍지를 가지고 노력하라!
映畵, 198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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