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 3. | 京城 齋洞 公立普通學校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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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3. | 京城 公立 京畿高等女學校 졸업 |
1939. 4. | 株式會社 丸善 서적부 입사 |
1940. 5. | 滿洲 新京音樂團 성악부 입단. 방송 합창단원을 겸함. |
1945. 11. | 귀국. 서울 중앙방송국 합장단원 입단. 동시에 주 일회 시낭송 프로 담당 |
1946. 3. | 고려 영화사 입사, 최 인규 감독의 "죄 없는 죄인"(당시 동시녹음 영화) 에서 스크립터로 출발. |
1954. | 영화계 재투신. "여군" 조감독.향후 "불사조의 언덕" "端宗哀史" "白痴 아다다" "水晶塔" "사랑" 등 약 10여편의 작품에 스크립터겸 조감독으로 종사. |
1959 -1962 | "早春"을 시작으로 "사랑의 십자가", "女人天下", "愛情 삼백 년"등 치프 조감독."白痴 아다다", "사랑"의 주제가 작사. |
1959. | "有情無情"으로 시나리오 데뷔 |
1960. | "젊은 設計圖" 공동 각색. "바위고개", "황혼" 각본 |
1962. | "女判事"로 감독 데뷔. |
1984. | "홀어머니" 윤색, 감독. "연애할 시간 없다" 각본. |
1965. | "오해가 남긴 것" 윤색, 감독. |
1966. | "소문난 여자", "댁의 부인은 어떻습니까" 각색. "하와이 연정" (洪 眞娥의 이름으로 원작). |
1968. | "이별의 모정" 각본. "흐느끼는 白鳥" 각색 |
1970. | "동경의 밤하늘" 각색 |
1975-1977. | 한국영화 진흥공사 창작기금 수령 작품: "彼岸의 戀人", "호반의 환상곡" 집필 |
1979. | 영화 유공자 표창 |
기타 희랍신화등의 낭송과 <노을의 산책>등의 구성작가같은 방송활동 등 다수 수상내역 : 영화인유공자 표창, 1987-1997 영화인 연금 수혜 |
경기고녀(高女) 시절부터 음악과 문학으로는 첫번째로 인정을 받던 홍은원은 종합예술인 영화, 특히 당대를 풍미하던 프랑스 영화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1946년 고려영화사에 입사하여 여배우를 추천하는 최인규 감독의 권유를 뿌리치고 스태프의 길로 들어섰다. 영화계 입문 전에는 신경음악단의 단원으로서 프리마돈나의 역할로 오페라에 서기도 하고 해방 후 결성된 서울 중앙방송국에서는 성악계로 진출한 많은 유명 음악인들과 합창단원을 지냈으며 영화의 일이 뜸해지기 시작한 70년대에는 방송일을 하는 등 음악,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진정한 문화예술인으로 종합예술인 영화 쪽에서 오랜 기간동안 모든 분야를 두루 거치며 활약했다. 홍은원이 추구하는 작품 경향 및 스타일은 예술성 짙은 담백하고 산뜻한 드라마 이다. 다만 타인들(제작자 또는 흥행사)의 구미와 요구에 성향을 맞출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생전에 "내세울만한 작품이 없다"고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 했을 정도로 만족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은원의 시나리오나 영화의 당시의 평은 "여성적인 섬세하고 깔끔한“ 작품들로 인정받았다.
본문은 우리대학 문헌정보학과 故 이희재 교수님이 舊홍은원영상자료관 웹사이트 구축 시, 쓰신 원고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