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없어졌어요
촬영현장을 떠난지 어언 15년, 그러니까 지금와서 따져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을 1960년대 초의 옛날 이야기가 된다. 그 당시로서는 유일한 紅一點 監督으로 활동하고 있던 내가 그 희소가치로 인해 많은 지상에 기사거리가 되었든 것이 사실이다. 그 가운데서 두어 대목을 拔萃해 보자.
- 홍여사는 예술적 소질과 재능과 그리고 미모까지 겸비한 드문 존재이며 자기의 전문 분야에 있어서 제일인자가 되려는 열성이 왕성한 예술인이다. (단 세작품으로 현역을 물러난 현실이 창피하고)
- 대체로 남성의 독점 직업인 영화 감독의 분야에 여성이 들어와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성공이란 작품의 결과를 놓고 이야기 되었어야 하는데 자신이 낳은 분신이라고 생각해도 정은 가지만 성공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女子가 영화계에 들어가 스크립터로 시작 치프조감독 4작품을 거치고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으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행운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런지는 모른다. (나 말고도 세분의 여류감독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아울러 제작을 겸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좋은 환경의 분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행운이라는 것이 龍頭蛇尾에 그치고 만 것이다. 밑거름 없는 토양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의 결과를 초래한 露呈한 셈이라고나 할까 우선 나 자신의 不足을 들자.
주제도 소재도 별로 내키지 않는 (하긴 그 무렵 울려주는 멜로드라머 만이 흥행사들의 구미를 자극했으니 어쩔 수 없다 치고) 작품에 손을 댔다는 점과 영화의 으뜸가는 조건인 영상의 빈곤을 들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밖의 요인으로는 제작자의 어처구니 없는 자금 사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세 작품 모두가 그렇게도 가난한 제작자의 손에 이루어 지게 된 불운. 진행비가 떨어져 몇 고비의 중단 상태를 넘겨야 했으니 바람직스러운 장소 세트 대도구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어는 것 하나 만족할 만한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 꼭 있어야 할 "신"을 삭제, 삭제로 넘긴 것도 不知其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작품 모두가 극장에 붙여졌다는 사실은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작품 가운데 제 2작인 <홀어머니> 촬영시의 현장 이야기 - 촬영 3분의 2선이 힘겹게 넘었을을 무렵 옴짝 달싹 못하는 자금난에 봉착 거의 재개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스탶들도, 뿔뿔이 흩어져 떠난 1년 몇 개월 후, 기적적으로 촬영재개의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선반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렇게 바랜 기록대장과 콘티 뭉치가 내려지고 더러 얼굴은 바뀌었지만 뒷스탶들이 웅성웅성 모여들고 사무실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 당시에는 하늘의 별따기 정도로 어려웠든 주연자들의 스케쥴도 그럭저럭 잡혔다. 물론 뒷스탶에게는 해당 안되는 추가 개란티를 지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잡으면 다른 촬영을 끝내고 온다는 사람이 안 오고 그 연기자를 잡아오면 먼저 왔든 사람은 다른데 갈 시간이라고 투덜대고 이렇게 살얼음판 촬영으로 하루 몇십커트식의 고된 작업이 진행되었다. 자 이제는 마지막 장소로 <홀어머니>의 집앞 야간 촬영만 남았다.
수십키로와트 조명기를 싣고 선발대로 조연출 1명과 기사진이 떠났다. 그런데 얼마 후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로 조감독이 하는 말, 감독님 저어 홀어머니의 집이 없어졌어요!
집에 없어지다니! 집이 없어지다니! 70년대 들어서는 자고나면 빌딩이 하나씩 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1960년대 초에는 이 말이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무위로 흘러간 1년 몇 개월 사이에 그 자리에 버젓한 3층 건물이 서 있었던 것이다.
川邊을 낀 홀어머니의 재봉공장이자 일가의 보금자리였던 집은 온데 간데가 없었다. 이미 찍어 놓은 세트와 낮에 찍은 집밖의 연결은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클라이막스로 이어지는 그 장면을 또 다시 삭제하는 수도 없고, 어찌됐건 연기자 제네레이터 야식 모든 것이 취소되고 그 날밤의 스케쥴은 펑크가 났다. 그리고 얼마 후 세트부에서는 단 일면짜리(출입문과 벽과 창으로된) 홀어머니의 집 대문밖 세트를 川邊가 어느집 앞에 세웠다. 한 여름 비오는 밤의 집 앞 씬은 이렇게 해서 그 이듬해 늦가을 연기자들이 여름옷으로 오들 오들 떨며 대 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映畵, 1980,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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