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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 영원한 나의 벗, 홍은원에게 쓰는 편지 (이희재: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장)

2023-11-25 조회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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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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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
참 오래 만에 엄마에게 편지를 쓴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던 게 1993년 빠리에 갔었을 때였던 것 같으니까 한 8년 만이네. 또 깨알 같은 글씨로 꼭 일주일에 한번씩 매일 매일의 일기를 써서 엄마와 주고받았던 빠리 유학시절의 그런 편지라면 내가 귀국한 게 1981년 바로 이맘 때였으니까 꼭 20년 만이라고 해야 할 것도 같고... 그 때의 그 기분으로 엄마에게 이 편지를 쓰는데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일기가 아닌 엄마와 이별한 후의 년기(年記) 정도를 쓴다는 것이고 더 이상 "사랑하는 쬬비야"로 시작하는 엄마의 답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
엄마, 난 내가 엄마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거나 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어. 엄마는 오직 나를 위해 그리고 내게 주기 위해 존재해야할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지. 그렇게도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과는 전혀 별도로 나는 엄마에게, 전통적인 예절을 지키는 입장에서 본다면, 거의 패륜에 가깝게 너무 못되게 굴었고, 너무 엇나갔고, 너무 나만 생각했었어. 지금 나는 그 이기심과 그 자기중심적 사고에 어이가 없고 치가 떨리고 있어. 남들은 그러네, 살아서도 엄마를 모시고 죽었어도 엄마를 잊지 못해 기념사업이랍시고 온힘을 쏟고 있는 나를 효녀라고, 그리고 엄마는 효녀 딸을 두어 좋겠다고... 그래, 맞았어, 어떤 부분 엄마가 가고 난 후 지금 정말 효녀가 된 것 같기도 하네. 그런데 엄마가 살아있을 때 내가 이렇게 뉘우치고 이렇게 엄마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 백 분의 일이라도 왜 하지 못했을까, 그게 가슴이 아리고 저려 와. 그래서 비가 오면 물가에 묻어둔 엄마 생각에 개골개골 울어대는 청개구리처럼 비가 오건 안 오건 혼자이건 아니건 사방에 대고 지금 개골개골 울어대고 있는 거야.
엄마가 가던 날, 지금 생각해보니 참 아쉬운 게 많네, 그 중에서도 생을 다하면서 표현한 정말 그 천사 같은 엄마의 얼굴을 남겨두지 못한 게 제일 아쉬워. 그 새벽, 엄마는 빨리 떠나고 싶은데 집에서 자고 있던 나를 기다려 주느라고 참고 있다가 내가 도착해서 부른 세 번의 "엄마!!!", 마지막 "엄마"는 그나마 끝을 직감한 나의 무너져 내리는 그것이었는데, 나의 목소리를 듣고는 맥박이 덜어지기 시작했지. 그 맥박과 반비례하면서 엄마의 얼굴은 점점 더 예뻐졌었어. 그 아름다운 얼굴을, 그 때, 난 죽은 엄마의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워서 피해버리는 것만이 능사인 듯 착각하고 마지막 염도 보지를 않았으니까... 참 대책없는 인간이지. 엄마의 죽음에 얼마나 대비 안 하고 있었는지 엄마의 영정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새벽에 엄마는 가고 전화는 걸어야겠는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도 없었어. 하여튼 어떻게든 간신히 연락을 취한 게 일본 이모, 꽁꾸아씨(막내 삼촌), 승황아줌마(엄마사촌), 종수아주머니(엄마친구), 정남이(친구), 학과의 사공철 선생님, 그리고 시나리오 위원회 최석규 선생님 그게 전부였었지. 그렇게 엉성했던데 비해 그래도 여러분들이 도와주어서 장례는 순조로이 진행되었어.
지금 생각하면 무슨 경황에, 참 불가사의한 일인데 장례가 끝나고 돌아와 단숨에 써버린 인사장 한번 읽어봐. 많은 분들이 잘 읽었다고 인사들을 해 주시데.
 
"지난 1월 5일 모친상을 당함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후의와 배려에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오랜동안 만성 폐쇠성 폐질환(폐기종과 천식)을 앓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을 몰랐고 그에 대한 대비도 전혀 하지 않았드랬습니다. 고인이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채근을 할 때도 "살아있는 사람 죽으라고 준비를 하느냐"고 퉁명스레 면박을 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저의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어떠한 경우에도 언제나 제 편이었던 모친의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가 제게는 없었고 어리석은 일인 줄 알지만 죽음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해 왔던 것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후 여러 가지 수치가 호전되는 듯했기 때문에 떠나는 날 새벽에도 부탁한 베개며 내복을 챙겨 놓았었습니다.
이렇게 황당한 이별에 그래도 제가 꿋꿋이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있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제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고인은 말년에 항상 '내세울만한 작품이 없다'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려운 시기에 수십여 편의 스크립터, 조감독을 거쳐 <여판사>를 비롯한 세 편의 영화감독과 <유정무정>을 비롯한 십수편이 넘는 시나리오의 집필, 그리고 지금도 애창되는 <백치 아다다>를 작사한 진실로 앞서가는 여성이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숙제는 이 기록을 작으마한 기념비에 남기어 후배들에게 알리고 용기를 주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적절한 위치를 찾아 마련해 놓은 후 그 때는 축제처럼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일일이 찾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도리인줄 알면서 황망중에 우선 서신으로 고마운 마음 전해드립니다. 천천히 꼭 찾아뵙겠습니다.
올 한해에도 의도하시는 일 모두가 잘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엄마, 이걸 구구절절이 쓰고 난 후 난 나한테 놀랬어. 각자의 인생에서 정말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놓고 밥을 먹고, 글을 쓰고, 더더구나 무슨 기념비를 세우고, 추모행사를 하고, 이 모든 걸 난 정말 비웃고 경멸하기 까지 했었거든. 그건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그저 자기만족에 자기 합리화를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할 거면 왜 살아있을 때 하지 못했느냐고... 그런데 인사장에 썼던 기념비로도 모자라 목표를 기념관으로 승격시켜 놓고는 그게 뭐 존재이유라나 이제는 아주 희희낙락 잘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 절대적인 사랑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회의가 드네.
어쨌든 엄마가 간 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주어진 임무는 우선 그 2년 전부터 약속되었던 빠리 고등연구원에서의 강의였고, 국제적인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서 몸과 마음이 아주 황폐해진 상황에서 3월 빠리로 가게 되었지. 연구지도교수라는 자격과 6회에 54.000프랑이라는 파격적인 대우가, 엄마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을까. 한국말로 하기도 어려운 판에 그 되지도 않을 6차례의 불어 강의는 너무 힘이 들었고 강의가 있는 날은 전 날부터 열이 나거나 배탈이 나는 등 다 죽어가다가도, 정말 이상하지, 강의가 시작되면 쉬지 않고 하는 2시간 강의를 단숨에 해치워 버렸으니까... 무슨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았고, 난 그게 엄마의 힘이라고 믿기 시작했어.

생전 당신은 그런데 안 가면서 재숙아줌마(엄마동창, 유네스코 본부에 근무하다 은퇴하심)가 나더러 꼭 가보라든 예언가의 말에서,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많은 위안과 용기를 얻었어. 이제 와서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궁금증도 없는데 뭣 하러 그런 곳을 가겠느냐는 말에 엄마를 위해 뭐를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다그치시기에 이병주 언니(빠리 7대학 교수)의 안내로 그냥 한번 가 보았고, 행여 유도심문에 걸려들까 20분 동안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간 얘기하며 이상하게 나의 심정을 잘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내가 엄마와 연상시키고 있는 Lumiere(빛이라는 단어와 영화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를 상징)라는 용어를 자꾸 거론하기도 하고 하여튼 맞는 얘기를 자꾸만 하는 거야. 하도 내가 말을 안 하고 있으니까 날보고 좀 물으래. 그래서 난 엄마가 잘 있나 그것이 제일 알고 싶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아, 행복하게도 그 때, 나의 울음을 터뜨리게 한 말 한마디, "Elle est plus heureuse que vous(그녀가 당신보다 더 행복합니다)." 그 때부터 나도 얘기를 시작했고 그 사람은 지금 자기가 엄마를 느끼고 있으며, 엄마는 항상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이루어진다고. 무슨 말을 그렇게도 했는지 1시간 40분이 지났어. 그 사람도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빠리에서의 강의가 끝난 후 부리나케 돌아왔어. 마침 안식년이라 더 있을 수도 있었지만 빨리 한국에 가서 엄마를 만나야지 뭐 그런 생각이었어. 엄마의 사진을 두어 장 가지고 가서 나의 진정한 은인인 스승 마르뗑(Henri Jean Martin) 내외분, 진정한 친구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그리고 그 이외의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을 보여주는데 현장 사진을 보고는 모두 이게 어느 시대냐고 묻고는, 그 시대에는 프랑스에도 그런 아방가르드한 여성이 없었다며 칭송을 하는 거야. 빨리 돌아가서 엄마의 사진들과 좀 더 옆에 있으면서 봐야겠다, 어차피 내 곁에서 나를 지키고 있다고 하니 별문제는 안 되지만 모습이 안 보이니까 답답해서 어쨌든 집에 가서 사진으로나마 모습을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었지.
가기 전에는 돌아오면 엄마 없는 집이 무섭고 쓸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사라도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엄마가 정말 나를 맞아주고 있다는 푸근한 생각이 드는 거야. 물론 영 만들어지지 않은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만 정신은 좀 돌아와 있었기에 천천히 지나간 엄마의 흔적들을 살펴나가기 시작했어. 시나리오 위원회에 기증했던 <? ? ? ?>는 제 자리를 찾아갔으니 괜찮다 쳐도 이모가 매월 꼬박고박 보내주던 정성도 덧없이, 짐이 된다고 이사 하면서 아예 다 버린 <? ? ? 旬報> <映畵の 友> <Screen> <Music Life>의 자리가 참 공허하게 닥아 왔고, 무엇보다도 다시 한번 땅을 치도록 아쉬웠던 것은 다른 건 다 없어져도 이것만큼은 없어지면 안 된다고 정성을 들여 싸놓았던 엄마의 각종 스크랩 상자가 이 집 이사할 때 영영 사라져 버리고만 것이었어. 그나마 3분의 1이나 될까, 반이나 될까 그냥 처박아 넣었던 자료들을 가지고 만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작은 흔적들조차도 그 역사가 엄청난 무게로 내 어깨를 내리 누르는 거야. 그래, 이건 기념비 정도가 아니라, 엄마의 분신이자 엄마의 자취를 고스라니 알고 있는 나, 이희재가 정말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일단 굳은 결심은 하게 되었지.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가운데 마침 영상자료원에서 영화인 데이터베이스를 만든다고 엄마에 대한 자료를 요청해 왔고 당시 정보화부장을 맡고 있었던 박진석 부장에게 사진 자료 등을 건네자 놀라며 어차피 나중에라도 스캔을 해야 할 터이니 먼저 그쪽에서 스캔을 하고 주면 어떻겠냐고... 이래서 정말 고맙게도 현장 사진의 많은 부분이 스캔되고 또 시나리오 중 5편이 워드 작업이 되면서 무언가 그 첫걸음이 시작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지. 그 후 곧바로 영상자료원과 연결되어 여성영화인 모임을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이 책을 출판하게 될 게기도 마련되었던 거야. 그러나, 시나리오 쪽에 적을 걸어놓았다고는 하나 워낙 엄마 자신도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고 단절의 시간도 어지간히 길다보니 1950대 후반부에서 60년대에 그 화려했던 영화계의 홍은원을 되찾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 명동에 나가면 온 시선을 집중시키던 엄마, 이리저리 매스컴과 문화부의 한 면을 장식하던 엄마, 촬영장 여기저기를 쫒아 다니면서 보았던 레디 고를 외치는 멋있는 엄마, 쓰거나 만든 영화에 대해 상당히 괜찮은 평을 받았던 엄마... 나는 기억이 너무도 생생한데 일반인은 물론 영화계 사람들로부터도 너무나 멀어져 있대. 당시와 같은 재조명을 시키기에 감독 작품은커녕 조감독한 작품이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작품들도 남아있지 못해서 많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야.
마침 작년과 올 초에 영상자료원이나 여성영화인 모임에서 다큐멘터리나 출판 후원을 받아보겠다는 시도를 해보겠다기에, 그러잖아도 살아있을 때나 잘하지 행여 딸내미가 자기도취에 빠져 자기 엄마 미화시킨다고나 할까 봐, 명분이 서겠다싶어 기다렸으나... 역시 단절의 골을 뛰어넘지 못했을까, 남아있는 작품의 빈약성 때문에 그랬을까, 결과는 원점이었어.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것을 내가 기획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출판과 홈페이지를 우선 만들게 되었지. 엄마의 남아있지 못한 작품들은 세계의 명화 컬렉션으로 한 단계 높인 수준의 영상자료관을 기획하는데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고,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에 홍은원과 이희재의 합작품으로 멋있게 승화시켜 본다는 게 앞으로의 계획이야. 이러한 기획과 계획의 결단을 세우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주신 우리 숙명여자대학교의 이경숙 총장님, 많지 않은 자료로 얼마나 어려움들을 겪으셨을텐데 선뜻 소중한 옥고(玉稿)를 써주신 신봉승 선생님, 호연찬 선생님, 변재란 교수님, 인사말을 써주신 임원식 감독님과 채윤희 여성영화인 모임 회장님, 그리고 여성영화인 모임의 여러분들, 홍은원을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하며 이 책을 펴내는데 힘을 기울여준 소도 출판의 이순진 대표, 많은 유형무형의 도움을 주면서 내 곁을 따뜻하게 지켜준 도서관 직원 선생님들, 학생들, 친지, 친구, 가족등 정말 앞으로 모든 것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는 모르지만 이 많은 분들께 그 공을 돌리고 싶어.
엄마를 추억하면서 나의 마음을 가장 슬프게 만든 건 엄마가 쓴 수필 중의 다음의 소절이야.
 
지금은 고인이 된 류두연씨가 한말이 생각난다.
「홍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판을 누비고 다니며, 카나리아 같이 노래를 부를 거야」그러나 그 말은 이미 내게서 멀어진 말이 아닌가?
「류선생님, 환갑은커녕 50도 못돼서 나에게는 발 들여 놀 한 뼘의 공간도 없어진 영화현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많은 친구들을 저 세상에 보내고 노래마저 영영 잊었어요. 아, 가만히 있어 봐요.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리네요. 아직은 확실치가 않지만 그 소리는 내 딸아이의 목소리 같아요. 엄마가 잊은 노래를 어쩌면 나의 딸아이가 찾아줄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애가 엄마 닮아서 영화라면 미치도록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아마 그 애는 나처럼 승산 없는 일에 뛰어들지는 않을 거예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뛰어들겠죠. 난 그렇게 믿어요, 꼭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내가 낳은 작품 중에는 가장 우수하다고 볼 수 있는 영리한 아이거든요.」
이걸 처음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무너져 내리는 가슴과 함께 생각난 건 주연이 몽고메리 크리프트라는 사실 이외에 어떤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라는 영화의 타이틀이었어. 아, 어쩌면 엄마는 내가 영화를 만들 걸 기대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마치 숙제처럼 좋은 영화를 감상하기는 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에 들어서는 일부러 아주 철저하게 부정하고 살았었지. 정신이 드는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글쎄... 텔레비전도 공략 못하던 영화사랑의 마니아들인 프랑스 사람들이 서서히 그로부터 눈길을 돌리고 있는 장편 극영화, 그게 컴퓨터와 인터넷의 영향이건 어쩌건 간에, 앞으로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크게 각광을 받게 될 것으로 추측되는 단편영화쯤 생각해볼 수도 있으려나... 아니야, 어쨌든 홍은원 영상자료관을 국내외 영화계의 명소로 만드는 게 나의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할래. 알아, 또 그러다가 뭐가 나올지.
빠리 유학시절, 매일 엄마에게 일기를 쓰던 나, 어쩌다 나가는 길에 엄마 편지를 받게 되면 길거리에서 펑펑 울어대는 나를 창렬이 아저씨(김창렬 화백. 작은 아빠와 작은 엄마의 친구로 어려서부터 집안이 아는 사이임)가 한번 보시고는 "너는 엄마와 이혼해야 결혼 하겠다"라고 웃으며 농담을 하셨는데, 하, 이런, 죽음도 우리를 갈라 놓치 못하네. 엄마!!! 기다려!!! 여기 일 대강 마치고 나도 거기 갈 꺼야. 아무리 즐겁고 행복한 하늘나라라도 파란 개구리과(科) 이희재 없이 엄마가 얼마나 심심하겠어. 가서 엄마 속 또 살살 뒤집어 주고 슬슬 엇나가는 짓도 해야 우리답지 않겠어? 그러니 심심하더라도 좀 참아. 그곳 하루가 여기 일년일 껄. 얼마 안 남았네 뭐.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의 엄마, 영원한 나의 벗, 홍은원!!! 그럼 만날 그 때까지 안녕!!! 빠이빠이!!!

2001년을 보내며

엄마의 쬬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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