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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객건연집은 조선 후기 북학파의 신진학자인 이덕무(李德懋:1741~1793)?유득공(柳得恭:1749~?)?박제가(朴齊家:1750~1805)?이서구(李書九:1754~1825)등 4명의 시를 초록한 시집으로, 1책의 필사본이다.
이덕무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영처(叛處)?동방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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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객건연집은 조선 후기 북학파의 신진학자인 이덕무(李德懋:1741~1793)?유득공(柳得恭:1749~?)?박제가(朴齊家:1750~1805)?이서구(李書九:1754~1825)등 4명의 시를 초록한 시집으로, 1책의 필사본이다.
이덕무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영처(叛處)?동방일사(東方一士)?신천옹(信天翁)이다. 정종(靖宗)의 제15자인 무림군 선생(茂林君善生)의 14세손이며, 상함(尙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계부사 필익(必益)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며, 어머니는 반남 박씨로 토산현감 사렴(사濂)의 딸이다.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도 달통했으며, 문장에 개성이 뚜렷해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어릴 때 병약하고 빈한해 전통적인 정규 교육은 거의 받을 수 없었으나 총명한 그는 가학(家學)으로써 6세에 이미 문리(文理)를 얻고, 약관에 박제가?유득공?이서구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었다. 특히 박지원(朴趾源:1737~1805)?홍대용(洪大容:1731~1783)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면의 급진적인 개혁 이론보다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고증학적 방법론에 많은 관심을 가져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 등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증학 대가들의 저서에 심취한 나머지 1778년(정조 2)에는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1734?1783)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직접 연경(燕京)에 들어가 기균(紀均)·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석학들과 교류하고 그곳의 산천·도리(道里)·궁실(宮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해 왔으며, 고증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가져왔다. 이름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에 박제가·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다. 14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규장각신(奎章閣臣)을 비롯한 많은 국내 학자들과 사귀는 한편, 규장각의 도서 편찬에도 적극 참여해 도서집성(圖書集成)?국조보감(國朝寶鑑)?규장각지(奎章閣志)?홍문관지(弘文館志)?송사전(宋史筌)?검서청기(檢書廳記)?대전회통(大典會通)?기전고(箕田攷)?규장전운(奎章全韻)?시관소전(詩觀小傳) 등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하였다고, 이후 정조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1781년 내각검서관으로 옮겨지고, 사도시주부(司歸寺主簿)?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비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사용해 박지원·박제가 등과 함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정조에게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기까지 했으나, 질병으로 1793년에 죽었다. 정조는 생시의 업적을 기념해 장례비와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어주고, 1795년 그의 아들 광규(光葵)를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지주(蜘蛛)와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한다. 저서로는 관독일기(觀讀日記)?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영처시고(叛處詩稿)?영처문고(叛處文稿)?예기고(禮記考)?편찬잡고(編纂雜稿)?기년아람(紀年兒覽)?사소절(士小節)?청비록(淸脾錄)?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앙엽기(沒葉記)?입연기(入燕記)?한죽당수필(寒竹堂隨筆)?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열상방언(洌上方言)?협주기(峽舟記) 등 16종이 있다.
유득공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那齋)?영암(那庵)?고운당(古芸堂)이다. 아버지는 춘(瑃)이다.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조선시대 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那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沒葉記)?사군지(四郡志)?규장각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가 많았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와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할 수 있는 대표작 발해고(渤海考)?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4,00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에는 거듭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보려는 민족주체적 역사 의식이 잘 나타나 있는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이 있다.
박제가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貞否)?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율(栗)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승지 평(坪)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해 북학파와 교유하였고,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 함께 건연집(巾衍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1720~1799)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내편에서는 생활 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1777년 3월에 정조의 서얼허통절목(庶椧許通節目) 발표이후로, 1779년 3월에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이 설치되어 그를 비롯한 이덕무?유득공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13년 간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들을 마음껏 읽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 간행하였으며,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수 있는 구폐책(救弊策)을 올렸는데, 이 때 그가 진언한 소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1790년 5월 건륭제(乾隆帝)의 팔순절에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1802)을 따라 두 번째 연행(燕行)길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아 연경에 파견되었다. 1794년 2월에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를 보아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사은사(謝恩使) 윤행임(尹行恁:1762~1801)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으로서 이 사건에 혐의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병으로 죽었다. 시와 그림, 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청대(淸代) 사고전서(四庫全書)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대련 형식(對聯形式)을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으며 조선 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구양순(歐陽詢)과 동기창(董其昌)풍의 행서도 잘 썼으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유작으로 대련글씨?시고(詩稿)?목우도(牧牛圖)?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어락도(魚樂圖)?야치도(野雉圖) 등이 있다. 저서로는 북학의?정유집(貞否集)?정유시고(貞否詩稿)?명농초고(明農草藁) 등이 있다.
이서구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洙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이다. 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을 증직받은 원(遠)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을 증직받은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부사 사관(思觀)의 딸이다. 1758년(영조 34) 이서구의 나이 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에게서 자랐다. 외숙으로부터 당시(唐詩)?사기?통감(通鑑) 등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 아버지에게 돌아와 여러 경전(經典)을 읽기 시작하였다. 16세부터 박지원을 만나 문장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770년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이서구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시문과 금석(金石)·육서(六書) 등을 읽었다. 21세 되던 1774년 가을에 정시(廷試) 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다. 10월에 섭기주(攝記注)로 첫 벼슬을 받았다. 22세 때인 1775년부터 5, 6년간은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특히 사서를 탐독하였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사서, 1786년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 뛰어났다. 사가시인 중에서는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외로움이 일생동안 영향을 미쳤다.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다. 아들이 없음과 늙어감과 벼슬을 한 일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한 번도 연행(燕行)길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홍대용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 등의 실학파 문사들과 사귀며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고 시국을 논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독창과 개성, 현실문제, 조선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문학을 하게 되었다. 22세 때에 이덕무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사가시인 또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문집으로 척재집과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전한다.
이 책은 1776년(영조 52) 유득공의 작은아버지 유련(柳璉)이 연행(燕行) 길에 가지고 가서 홍대용을 통하여 이미 문통이 있었던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의 서문을 얹어 1777년 중국에서 간행하였다. 개인시집이 아니고 네 사람의 작품집이었기 때문에 뒤에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에 1917년 및 1921년에 ‘전주사가시(箋註四家詩)’라는 표제로 박경길(朴景吉)이 주를 달고 백건칠(白建七)이 교정하여 재판을 간행하였다.
내용을 작가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덕무는 육언시(六言詩) 1수와 칠언절구(七言絶句) 28수, 오언율시(五言律詩) 14수, 칠언율시(七言律詩) 48수, 오언고시(五言古詩) 3수, 칠언고시(七言古詩) 5수로 모두 99수이다. 유득공은 육언시 8수, 오언절구 1수, 칠언절구 35수, 오언율시 19수, 칠언율시 19수, 오언고시 13수, 칠언고시 1수, 동금언(東禽言) 4수로 모두 100수이다. 박제가는 육언시 1수, 오언절구 6수, 칠언절구 25수, 오언율시 18수, 칠언율시 45수, 오언고시 4수, 칠언고시 1수로 모두 100수이다. 이서구는 육언시 3수, 오언절구 3수, 칠언절구 28수, 오언율시 14수, 칠언율시 28수, 오언고시 13수, 칠언고시 1수로 모두 100수이다.
한객건연집에서 사가의 특징은 답습(踏襲)?진부(陳腐)를 버리고 독창?참신을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이덕무는 증인지임금교찰방(贈人之任金郊察訪)에서 늘그막에 벼슬길에 나서는 노인과 모여서 웃고 있는 소년을 대비시켜 묘사하였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휘날리는 살구꽃 속에 뽐내며 날뛰는 말들을 감각적으로 그려내어 조선의 자연 풍경, 자기의 생활상을 그리려는 조선시풍을 살펴 볼 수 있다. 유득공의 시에는 강한 역사의식이 나타난다. 음향성에 밝은 그는 민족의 역사를 음향성을 감안하여 읊고 외우기 쉬운 시 형식을 빌어서 고취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서구는 나이가 가장 어렸으나 비교적 중후한 맛이 있는 시를 썼다. 이서구의 시는 그의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혁신적이거나 현실에만 치우치기보다 온유돈후하고 사색적이다. 사물을 관조하는 자세로 담백하게 고묘(高妙)한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많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세계와 고귀한 내면의 깊이를 아울러 그려냄으로써 시의 격조를 높이는 데 힘썼다. 이서구를 제외한 셋은 서출이어서 관로가 널리 트이지 못했는데,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대신 학문과 예술의 세계에 정진하여 실학사상의 영향아래 독창적이고 참신한 조선(朝鮮) 고유의 문화를 창조하기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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